팥죽 할멈과 호랑이
팥죽 끓는 냄새가 아침부터 마당을 건너, 사립문 밖까지 번져 나갔습니다. 낮은 굴뚝에서는 하얀 김이 오르고, 가마솥에서는 붉은 팥죽이 보글보글 익어 갔지요. 동짓달 첫 추위가 찾아온 산골 아침이었어요.
고개 너머 외딴집, 팥죽 할멈네 솥이었답니다. 할멈은 봄에 팥을 심고 여름내 김을 매고, 가을에 거둔 팥으로 해마다 이날 죽을 쑤었지요. “올해 팥이 잘 여물어서, 죽이 참 곱게 쑤어졌구먼.” 주름진 얼굴에 웃음이 오래 머물렀습니다.
그 냄새가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던 모양이에요.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냄새를 따라 내려와, 어느새 사립문 앞에 서 있었지요. “할멈, 할멈! 그 팥죽 몽땅 나 줘! 나 혼자 다 먹을 거야!” 몸집은 산만 한데, 말투는 꼭 떼쓰는 아기 같았답니다.
할멈은 놀란 가슴을 누르고, 일부러 천천히 대답했습니다. “아직 팥이 설익어서 떫다오. 해 진 뒤에 오면 큰 그릇으로 퍼 주리다.” 호랑이는 침만 삼키다가, 몇 번이나 다짐을 받고서야 산으로 돌아갔더랍니다.
혼자 남은 할멈은 가마솥 앞에 한참을 서 있었어요. “이웃들하고 나눠 먹을 죽인데, 몽땅 내주면 어쩐다냐.” 그 한숨 소리를 들은 손님들이, 마침 마당에 들어서고 있었답니다.
해마다 이날이면 팥죽 한 그릇씩 얻어먹으러 오는 오랜 친구들이었지요. 알밤과 자라, 그리고 이 집 마당에서 함께 늙은 지게와 멍석까지. 이야기를 들은 알밤이 맨 먼저 나섰습니다. “할머니, 걱정 마세요! 제가 아궁이 재 속에 들어가 숨어 있을게요.”
자라가 물독 곁에서 목을 길게 빼고 말을 이었지요. “저어는 물독에서 기다리지요오. 코가 오거든 한 번 물어 주지요오.” 말끝을 길게 끄는, 서두를 줄 모르는 말투였답니다.
마당의 지게와 멍석도 가만있지 않았어요. “저는 마당 가운데에 버티고 서 있겠습니다!” “저는 사립문 앞에 누웠다가, 품을 벌려 안아 드리지요.” 지게는 우렁차고, 멍석은 능청스러웠지요.
해가 서산을 넘어가자, 저마다 제자리로 찾아 들어갔습니다. 알밤은 아궁이 재 속으로, 자라는 물독 속으로. 가마솥에서는 팥죽이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보글보글 끓고 있었고요.
밤이 이슥해지자 호랑이가 다시 마당에 들어섰답니다. “할멈, 나 왔어! 약속한 팥죽 내놔. 지금 당장, 몽땅 다!” 그러고는 부엌이 따뜻하겠다 싶었는지, 아궁이 앞에 코부터 들이밀었지요.
바로 그때, 재 속에서 알밤이 톡 튀어 올랐습니다. 뜨겁게 달아오른 몸으로, 호랑이 코끝을 정통으로 맞혔지요. “앗, 뜨거! 코야, 내 코야!” 호랑이는 두 발로 코를 움켜쥐고 부엌에서 뛰쳐나왔어요.
얼얼한 코를 식히려고, 호랑이는 물독에 코를 깊이 담갔답니다. 물독 안에서 기다리던 자라가 그 코를 물었지요. 아프지 않게, 그러나 아주 단단히. “아이고! 물속에 누가 살아! 이 집은 물도 무는 집이야!”
호랑이가 뒷걸음질을 치자, 이번에는 마당 가운데의 지게가 기다렸다는 듯 등 위로 넘어왔습니다. “어딜 그리 급히 가십니까. 인사는 하고 가셔야지요.” 지게를 등에 업은 호랑이는, 그것을 떨어뜨리려고 마당을 두 바퀴나 돌았대요. 긴 다리가 어깨를 잡고 있으니, 혼자서는 어쩔 수가 없었고요.
사립문 앞에서는 멍석이 몸을 반쯤 일으켜, 넓은 품을 벌리고 기다렸답니다. “이 집은 멍석까지 살아 있어! 나, 팥죽 안 먹을래!” 호랑이는 지게를 마당에 내려놓기가 바쁘게, 울타리를 돌아 산으로 내달렸지요. 고갯마루를 넘어가는 뒷모습이, 꼭 낮잠에서 막 깬 아기 같았답니다.
조용해진 마당에, 이번에는 웃음이 번졌어요. “고맙다, 얘들아. 오늘 밤 제일 첫 국자는 너희들 차지란다.” 할멈은 김이 오르는 팥죽을 한 그릇씩 돌리고, 사립문 밖에도 말없이 한 그릇 놓아두었지요. 산으로 돌아간 그 손님도, 오늘만은 속이 따뜻했으면 해서요.
그날 밤 할멈네 작은 방에는, 팥죽 냄새와 웃음소리가 가득 찼답니다. 호랑이 코끝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다들 배를 잡았고, 자라만 시치미를 떼서 더 우스웠지요. 김 오르는 그릇 사이로 숟가락이 바쁘게 오가고, 빈 그릇이 하나씩 포개졌어요. 웃음소리는 조금씩 순해지다가, 마지막에는 고른 숨소리로 바뀌었답니다.
"할머니, 걱정 마세요! 제가 아궁이 재 속에 들어가 숨어 있을게요." 아빠는 요 조그만 알밤의 말이 참 좋았어. 알밤은 아궁이를, 자라는 물독을, 지게와 멍석은 마당을 맡았지. 저마다 제일 잘 아는 자리 하나씩이었어. 그 작은 약속 네 개가 한 마당에 모이니, 산만 하던 걱정이 하룻밤 웃음으로 바뀌었단다.
그런데 팥죽 냄새는 어떻게 담장을 넘고 산꼭대기까지 올라갔을까? 아빠 생각에는, 혼자 먹지 않는 할멈의 마음이 냄새보다 한 발 먼저 길을 나섰던 것 같아. 해마다 가장 따뜻한 그릇부터 이웃과 나눠 온 그 마음 덕분에, 어려운 날 친구들이 제 발로 마당에 모여든 거란다. 우리 아가 곁에도 그렇게 냄새만 맡고도 달려와 주는 다정한 얼굴들이 오래 머물렀으면 좋겠어.
우리 아가야, 오늘 밤 꿈에서는 그 작은 방에 한 자리 얻어 앉으렴. 김이 제일 곱게 오르는 팥죽 한 그릇을 받아 들고, 알밤 옆에서 실컷 웃다 오렴. 아빠가 여기서 이야기를 읽어 주는 동안, 그 방의 웃음소리가 우리 방까지 건너오는 것만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