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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옛이야기 · 한국 전래동화 '토끼의 재판'

토끼의 재판

한국 전래동화 · 아빠 태담 잠자리 이야기 · 약 4분

“거기 누구 없소? 여기 좀 내려다봐 주오!” 산고갯길 어디선가 굵고 낮은 목소리가 울려 왔어요. 봇짐을 멘 나그네 하나가 걸음을 딱 멈추었지요.

길섶에 사냥꾼들이 파 놓은 깊은 구덩이 하나. 그 바닥에서 커다란 호랑이가 동그란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답니다. 밤새 뛰어올라 보았지만, 미끄러운 흙벽에는 발톱 하나 걸리지 않았대요.

호랑이는 커다란 앞발을 모아 싹싹 빌었어요. “꺼내만 주면 이 은혜는 꼭 갚겠소. 약속하오, 약속!” 나그네는 잠시 망설였습니다. 저렇게 비는 이를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었거든요.

나그네는 쓰러진 통나무 하나를 낑낑 끌어다 구덩이에 걸쳐 주었답니다. 호랑이는 그것을 밟고 엉금엉금 기어 올라왔지요. 흙 묻은 꼬리를 툭툭 털고 나서는, 웬일인지 나그네와 눈을 맞추지 않았어요.

땅을 밟은 호랑이가 헛기침을 한 번 했습니다. “어흠, 아까 그 약속은 없던 일로 하겠소. 사람이 판 구덩이에서 사람이 꺼내 준 거니, 갚을 것도 없지 않소?” 나그네는 하도 어이가 없어 입이 떡 벌어졌대요.

나그네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어요. “허허, 이거 참. 그럼 누가 옳은지 길에서 만나는 이에게 물어봅시다.” 호랑이도 좋다며 성큼 앞장을 섰지요.

고갯마루에는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더니, 소나무가 굽은 가지를 삐걱 흔들었어요. “사람들은 내 그늘에서 실컷 쉬어 가고는 내 가지를 뚝뚝 꺾어 가더구먼. 난 사람 편은 못 들겠네.”

고개를 조금 내려가니 밭머리에 누렁 황소가 엎드려 있더랍니다. 황소는 되새김질을 하며 눈을 느릿느릿 감았다 떴어요. “음머어… 나는 평생 쟁기만 끌었는데, 고맙다는 소리는 못 들어 봤소. 그러니 약속이고 뭐고 잘 모르겠소.”

호랑이는 그것 보라는 듯 수염을 쓱 쓸어내렸지요. 나그네는 어깨가 축 처졌고요. 바로 그때 풀숲이 바스락바스락. 하얀 토끼 한 마리가 귀를 쫑긋 세우고 나왔어요.

호랑이와 나그네는 서로 먼저 말하겠다며 한꺼번에 떠들었답니다. 토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갸웃했어요. “네? 그러니까 나그네님이 구덩이에 빠졌는데 호랑이님이 꺼내 주셨다고요? 아니면 소나무님이 빠졌던가요?”

호랑이는 답답해서 커다란 발을 동동 굴렀대요. 아니, 아니, 구덩이에 빠진 건 자기였고 꺼내 준 건 저 나그네라고요. 토끼는 더 알쏭달쏭한 얼굴로 앞발을 턱에 괴었습니다. “아이참, 말로만 들으니 통 모르겠네요. 그게 어떻게 된 일인지 처음부터 보여 주세요.”

호랑이는 구덩이로 성큼성큼 가더니, 그 안으로 훌쩍 뛰어내렸지요. 그러자 토끼가 걸쳐 있던 통나무를 영차, 옆으로 밀어 두었어요. 처음부터 보여 달라 했으니, 처음 그대로여야 하니까요.

구덩이 바닥에서 올려다보니, 동그랗게 뚫린 하늘이 아까와 똑같았답니다. 미끄러운 흙벽도, 위에서 내려다보는 나그네의 얼굴도요.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꺼내만 주면 은혜를 꼭 갚겠다고…” 호랑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끝내 뚝 그쳤어요.

호랑이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습니다. 이윽고 구덩이 위를 향해 커다란 고개를 깊이 숙였지요. 나그네는 허허 웃으며 통나무를 다시 걸쳐 주었대요.

이번에 올라온 호랑이는 헛기침을 하지 않았어요. “봇짐 이리 주오. 해 지기 전에 고개 너머까지 내가 지고 가리다.” 토끼는 코를 실룩이며 빙긋 웃고는 풀숲으로 쏙 들어갔지요.

그날 저녁, 노을 진 고갯길을 호랑이와 나그네가 나란히 넘었답니다. 호랑이 등에는 나그네의 봇짐이 얌전히 얹혀 있었지요. 마을 불빛이 보이는 언덕에서 둘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어요. 돌아가는 호랑이의 등 뒤로, 둥근 달이 고갯길을 환하게 비춰 주었습니다.

아빠 한마디 ✶

아빠도 약속을 해 놓고 슬그머니 모른 척하고 싶었던 날이 있었어. 급할 때는 뭐든 하겠다고 해 놓고, 일이 풀리고 나니 그 말이 괜히 무겁더라. 그래서 구덩이를 빠져나온 호랑이가 헛기침하던 얼굴이, 아빠한테는 남 같지 않았단다. 그런 호랑이를 처음 그 자리에 다시 세워 준 토끼가 참 고마웠어. 같은 흙벽, 같은 하늘 아래에서 호랑이는 제 목소리를 다시 들었거든.

우리 아가는 약속을 할 때, 숨을 한 번 고르고 천천히 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 약속이 무겁게 느껴지는 날엔, 그 말을 처음 했던 자리로 마음을 데려가 보렴. 거기서 들리는 너의 목소리가, 어느 쪽으로 걸어가야 하는지 알려 줄 거야.

나그네처럼 통나무를 한 번 더 걸쳐 줄 줄 아는 너른 마음도 함께 품었으면 해. 약속을 지키는 사람과 한 번 더 믿어 주는 사람이 나란히 걸으면, 고갯길 봇짐도 한결 가벼워진단다.

봇짐은 내려놓고 푹 자렴, 우리 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