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주전자가 된 너구리
부글부글, 부글부글. 어디선가 물 끓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산기슭 외딴집에서, 마음씨 좋은 아저씨가 저녁 찻물을 올려 둔 소리였어요. 살림은 가난해도 따뜻한 차 한 잔만은 거르는 법이 없었지요.
그런데 찻잔은 늘 하나뿐이었습니다. 마주 앉아 마실 사람이 없었거든요. “차는 둘이 마셔야 더 맛있는 법인데.” 김이 오르는 잔을 앞에 두고, 아저씨는 오늘도 혼잣말을 했답니다.
이튿날 아저씨는 나무를 하러 산에 올랐다가, 덤불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어요. 안쪽에서 가늘게 훌쩍이는 소리가 났거든요. 헤쳐 보니 어린 너구리 한 마리가 덫에 발이 걸린 채 떨고 있었습니다.
“아이고, 요 발이 많이 아팠겠구나.” 아저씨는 덫을 살며시 벌려 너구리를 꺼내 주고, 다친 발에는 넓은 잎사귀를 감아 주었습니다. 품에 있던 주먹밥 반쪽도 마저 나눠 주었지요. 너구리는 젖은 눈으로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고는, 숲으로 천천히 사라졌답니다.
그날 밤, 문밖에서 조그만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저씨, 저예요. 낮에 만난 너구리예요.” 문을 여니 정말 그 너구리가 서서, 다 나은 발로 꼬리를 크게 흔들고 있었어요.
“아저씨네 찬장이 텅 빈 걸 봤어요. 제가 근사한 찻주전자로 변할 테니, 저를 절에 내다 파세요.” 아저씨는 놀라 손사래를 쳤지만, 너구리는 벌써 마음을 정한 얼굴이었지요. 도와줄 생각에 신이 난 얼굴이기도 했고요.
너구리가 마루 위에서 한 바퀴 재주를 넘었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배가 둥글고 윤이 나는 놋쇠 찻주전자가 얌전히 놓여 있었어요. 아저씨가 눈을 비비고 또 비벼도, 마루 위에는 근사한 주전자 하나뿐.
이튿날 아저씨는 주전자를 안고 산 너머 절을 찾아갔어요. 스님은 주전자를 이리 보고 저리 보더니 무릎을 쳤지요. “허어, 배가 둥그니 복스럽기도 하지. 이 주전자, 내가 사고말고.” 엽전 꾸러미를 받아 든 아저씨는, 돌아오는 길에 자꾸만 절 쪽을 돌아보았답니다.
그날 오후, 스님은 새 주전자에 물을 가득 붓고 화로에 올렸습니다. 이윽고 주전자가 노래하듯 끓기 시작했지요. 분부쿠, 분부쿠. 어찌나 듣기 좋은 소리인지, 동자승들이 하나둘 부엌을 기웃거렸대요.
“앗, 뜨거!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갑자기 주전자 뚜껑이 들리더니, 그 밑으로 꼬리가 나오고 몸통 옆으로 털북숭이 네 발이 나왔어요. 반은 주전자요 반은 너구리인 채로, 화로에서 뛰어내려 절 마당을 내달렸지요.
“어이쿠, 주전자에 다리가 달렸구나!” 스님이 엉덩방아를 찧는 바람에, 동자승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너구리 주전자는 그 틈에 담장을 넘어, 아저씨네 집까지 한달음에 달아났지요.
“아저씨, 아무래도 저는 물 끓이는 재주는 글렀나 봐요.” 시무룩하게 돌아온 반쪽 주전자를 보고, 아저씨는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어요. “하하, 돌아왔으면 됐다. 엽전이야 스님께 도로 갖다드리면 그만이지.” 아저씨가 행여 데인 데가 없나 살펴보았지만, 다행히 너구리는 어디 하나 안 다치고 멀쩡했답니다.
그런데 이내, 풀이 죽어 있던 너구리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뭐예요. “아저씨, 이번엔 진짜 좋은 수가 떠올랐어요. 저, 줄타기라면 누구한테도 안 져요.” 아저씨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자, 너구리는 씩씩하게 덧붙였지요. “너구리 발바닥은 줄 위에서 미끄러지는 법이 없거든요.”
며칠 뒤 장이 서는 날, 절 마당에 긴 줄이 내걸렸답니다. 아저씨가 북을 울리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지요. 몸통은 주전자, 네 발은 너구리인 재주꾼이 줄 위를 다다닥 건너가자, 온 마당에 웃음이 터졌어요. 뚜껑을 모자처럼 쓰고 거꾸로 다다닥 돌아오는 대목에서는, 스님이 제일 크게 웃었습니다.
“허허, 주전자 값은 오늘 이 웃음으로 다 받았고말고.” 스님은 아저씨가 내민 엽전 꾸러미를 한사코 도로 쥐여 주었어요. 아저씨는 그 돈으로 향 좋은 찻잎과 말랑한 떡을 넉넉히 사서, 구경 온 사람들 모두와 나눠 먹었지요. 절 마당 가득, 고소한 떡 냄새와 웃음소리가 저녁까지 남았답니다.
저녁이 오면, 이제 아저씨네 마루에는 찻잔이 두 개 놓인답니다. “역시 차는 둘이 마셔야 제일 맛있구나. 그렇지, 친구야?” 너구리는 대답 대신 콧노래로 물 끓는 소리를 흉내 냈지요. 분부쿠, 분부쿠.
고마운 마음은 찻주전자에 담긴 물 같은가 봐. 좋아하는 사람 곁에서는 데우지 않아도 분부쿠, 저 혼자 노래를 시작하니 말이야. 너구리는 물 끓이기에는 서툴렀지만, 아저씨 얼굴에 웃음을 끓이는 일만큼은 온 마을에서 제일이었지.
해 질 녘 마루, 나란히 놓인 찻잔 두 개. 아빠는 이 이야기에서 그 마지막 장면이 제일 좋았어. 대단한 보물이 생긴 것도 아닌데, 혼자 마시던 첫 찻잔보다 둘이 마시는 찻잔에서 김이 더 오래 오르는 것 같았거든.
언젠가 우리 아가의 찻잔 맞은편에도, 그렇게 잔을 놓아 주는 친구가 마주 앉았으면 해. 서로의 서툰 재주에 같이 웃어 주고, 잘하는 재주는 같이 기뻐해 주는 사이 말이야. 그리고 아빠는 언제까지나, 우리 아가의 찻잔이 식기 전에 마주 앉는 아빠이고 싶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