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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옛이야기 · 그림 형제 '홀레 할머니'

눈을 내리는 할머니

서양 전래동화 · 아빠 태담 잠자리 이야기 · 약 4분

마을 끝에 깊은 우물 하나. 들여다보면 저 아래 동그란 하늘이 비칠 만큼 깊었지요. 그 우물가에 날마다 앉아 실을 잣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소녀는 새어머니, 언니와 함께 살았대요. 집안일은 거의 소녀의 몫이었지만, 소녀는 군말 없이 손을 움직였답니다. 실 잣는 솜씨는 마을에서 제일이었고요.

그러던 어느 날, 실패가 그만 손에서 미끄러졌습니다. “안 돼, 내가 제일 아끼는 실팬데!” 실패는 벌써 우물 저 깊이 가라앉은 뒤였어요. 소녀는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실패를 따라 우물 속으로 뛰어들었지요.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지요. 차가운 물 대신, 발밑에 보드라운 풀밭이 깔려 있었거든요. 코끝에는 꽃향기가 스치고, 멀리서 새소리가 들렸습니다. 우물 아래에, 햇살 가득한 다른 세상이 있었던 거예요.

풀밭 길을 한참 걷는데, 커다란 화덕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답니다. “저희 좀 꺼내 주세요! 다 구워진 지 한참인걸요.” “조금만 기다려요. 하나씩 차례차례요.” 소녀는 빵을 모두 꺼내어, 바람 드는 자리에 가지런히 놓아 주었어요.

이번에는 사과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무겁게 늘어뜨리고 있었지요. “제 가지 좀 흔들어 주세요. 사과가 다 익었거든요.” 소녀는 나무를 잡고 흔들어, 떨어진 사과를 한데 모아 주었습니다. 가벼워진 나무가 잎을 흔들며 고마워했대요.

길 끝에 작은 집 한 채. 문 앞에는 눈처럼 하얀 머리의 할머니가 서 있었지요. “나는 홀레 할머니란다. 내 이불을 아침마다 털어 주겠니?” 느리고 낮은 목소리에, 소녀의 마음이 저절로 놓였답니다.

“네, 할머니. 이불 터는 거라면 자신 있어요.” 소녀는 그렇게 할머니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첫날 저녁에는 따뜻한 수프를 나누어 먹었지요.

이튿날 아침, 소녀는 두툼한 이불을 안아다 창가에 걸쳤습니다. 톡톡, 팔이 아프도록 힘껏 털자, 하얀 깃털이 구름처럼 날아올랐어요. “네가 깃털을 높이 날릴수록, 저 위 세상에는 눈이 내린단다.”

소녀는 하루도 거르지 않았어요. 손이 시린 아침에도, 조금 고단한 아침에도 이불만은 힘껏 털었지요. 그럴수록 저 위 세상에는 눈이 넉넉히 내렸을 거예요. 할머니는 그런 소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웃었대요.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났을까요. 어느 저녁, 소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할머니, 여기가 참 좋은데요, 집 굴뚝 연기가 자꾸 생각나요.” 감추지 않고 그대로 말하는, 정직한 목소리였지요.

할머니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답니다. “그리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구나. 자, 나를 따라오렴.” 그러고는 소녀의 손을 잡고, 커다란 문 앞으로 데려갔습니다.

소녀가 문을 지나는 순간, 금빛 비가 쏟아졌어요. 머리끝부터 치맛자락까지, 온몸이 금빛으로 환해졌지요. “부지런한 손과 정직한 입에 주는 선물이란다. 네 실패도 여기 있단다.” 할머니는 실패를 소녀의 손에 쥐여 주었답니다.

문밖은 신기하게도 집 앞 마당이었대요. 울타리 위 수탉이 목을 길게 빼고 외쳤지요. “우리 금빛 아가씨가 돌아오셨다!” 새어머니와 언니도 달려 나와, 말을 잊은 채 소녀를 맞았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언니도 우물로 가 보았지요. 하지만 빵도 사과나무도 그냥 지나쳤고, 이불은 두어 번 흔들다 말았답니다. 그래서 문을 나설 때,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빈손으로 돌아왔어요. “언니, 다음엔 나랑 같이 가자. 이불 터는 법부터 알려 줄게.”

그해 겨울, 마을에 첫눈이 펑펑 내렸습니다. 소녀는 언니의 이불깃을 턱밑까지 여며 주며 속삭였지요. “저것 봐, 지금 홀레 할머니가 이불을 터시나 봐.” 지붕마다 흰 눈이 소리 없이 쌓여 갔어요.

아빠 한마디 ✶

아빠는 홀레 할머니네 아침을 자꾸 그려 보게 돼. 소녀가 이불을 두 손 가득 안고 창가에 걸친 다음, 톡톡, 깃털이 하늘 높이 날리도록 터는 모습 말이야. 누가 보지 않아도 하루도 거르지 않던 그 두 팔이, 아빠 마음에 참 오래 남는구나.

이다음에 창밖으로 눈이 펑펑 오는 날이면, 아빠가 너를 안고 창가에 서서 말해 줄게. 지금 저 위에서 홀레 할머니가 이불을 터시는 거라고. 그러고는 오늘 밤처럼, 네 이불깃을 가만히 여며 줄 거야.

그리고 아빠는 우리 아가가, 화덕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던 그 손과, 그립다고 바로 말할 줄 알던 그 목소리를 닮았으면 좋겠어. 금빛 비는 그런 손과 그런 목소리를 오래 기억했다가 찾아오는 거라고, 아빠는 믿거든.

잘 자렴, 우리 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