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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옛이야기 · 이솝 우화 '개미와 베짱이'

겨울 문을 열어 준 개미

서양 전래동화 · 아빠 태담 잠자리 이야기 · 약 4분

“여름아, 여름아, 조금만 천천히 가 주렴.” 들판 어디선가 고운 노랫소리가 먼저 들려왔습니다. 키 큰 풀을 살며시 헤치면, 풀잎 끝에 앉아 노래하는 초록 베짱이가 보였지요.

그 노래를 들으며 개미는 짐을 날랐어요. 등에 진 것은 제 몸보다 큰 보리 한 알. 사각사각, 풀뿌리 사이로 개미의 작은 발소리가 오갔답니다.

“개미야, 잠깐만 쉬었다 가. 시원한 노래, 한 곡 더 뽑아 줄게.” “고맙지만 지금은 안 돼. 겨울이 오기 전에 곳간을 채워야 하거든.” 말은 그렇게 해도, 개미의 발걸음은 어느새 노래 박자를 타고 있었지요.

베짱이의 노래는 그저 노는 소리가 아니었답니다. 그 가락에 맞춰 밀이삭이 춤을 추고, 지친 꿀벌도 허리를 폈어요. 무거운 짐도 노래를 만나면 반쯤 가벼워지는 것 같았지요.

여름 들판은 냄새로도 가득했대요. 마른 풀 냄새, 해가 데운 흙냄새, 달큰한 꽃 냄새. 개미는 그 사이를 하루에도 백 번씩 오르내렸습니다.

이마에 맺힌 땀이 눈썹까지 흘러내리는 날도 있었어요. 그럴 때면 베짱이의 노래가 바람처럼 개미의 이마를 식혀 주었습니다. “저 노래 덕에 오늘도 힘이 나는걸.” 개미는 작게 혼잣말을 했지요.

가을이 오자 들판의 노래는 조금씩 나직해졌습니다. 개미의 곳간은 보리와 콩으로 그득해졌고요. 베짱이는 마지막 남은 잎 위에서, 여름에게 들려주는 기다란 배웅 노래를 불렀답니다.

이윽고 겨울이 왔습니다. 하늘에서 눈이 펄펄 내려 풀도 길도 하얗게 덮였지요. 노래하던 자리에는 바람 소리만 남았어요.

베짱이는 마른 풀줄기 아래에서 몸을 작게 웅크렸답니다. 먹을 것이 없어진 지는 벌써 며칠째였어요. 그때 저 멀리, 눈밭 너머로 노랗고 동그란 불빛 하나가 보였지요.

개미네 문 앞에서 베짱이는 한참을 서 있기만 했습니다. ‘여름 내내 노래만 부른 내가, 무슨 낯으로 이 문을 두드리나.’ 긴 더듬이가 자꾸만 아래로 처졌어요.

그래도 추위가 등을 떠밀어, 베짱이는 아주 작게 문을 두드렸어요. “누구야? 이 눈 오는 밤에.” “나야… 베짱이야. 불빛이 하도 따뜻해 보여서.” 문틈으로 새어 나온 목소리 앞에서, 베짱이의 말끝이 가늘게 떨렸지요.

문은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열렸습니다. “베짱이구나! 이 추운 날, 왜 이제야 왔어.” 개미는 베짱이의 언 손을 꼭 잡아 난롯가로 이끌었지요.

구수한 보리죽 한 그릇이 베짱이 앞에 놓였답니다. “여름 내내 네 노래를 들으며 일했는걸. 이 곳간의 절반은 네 노래가 채운 셈이야.” “개미야…” 베짱이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뜨거운 죽을 한 술 떠먹었어요.

이튿날부터 개미네 방에는 노랫소리가 함께 살았어요. “재워 주고 먹여 준 값이야. 겨우내 너를 위해 부를게.” 베짱이는 난로 옆에 앉아 하루치의 가장 순한 곡을 골랐습니다.

눈이 펄펄 내리는 밤이면 개미는 일을 마치고 난롯가에 앉았습니다. 그러면 베짱이의 노래가 여름 들판의 냄새까지 방 안으로 데려왔지요. 부지런한 발소리와 고운 노랫소리가, 나란히 겨울을 건너갔답니다.

난롯불이 낮게 타오르는 방 안이었습니다. 잠이 오는 개미의 눈꺼풀 위로, 노래가 이불처럼 내려앉았지요. “잘 자, 개미야. 내일 밤에도 여기서 불러 줄게.” 세상에서 가장 작고 따뜻한 자장가였답니다.

아빠 한마디 ✶

"이 곳간의 절반은 네 노래가 채운 셈이야." 문을 열어 준 것도 고마운데, 개미는 이런 말까지 건넸단다. 부지런한 제 발만 자랑하지 않고, 그 여름을 함께 만든 베짱이의 노래를 같이 기억해 준 거야. 아빠는 그 한마디가 난롯불보다 방을 더 데웠다고 생각해.

개미는 보리 한 알을 나르고, 베짱이는 노래 한 소절을 날랐지. 저마다 나르는 것이 다를 뿐이었어. 어느 쪽이든 아빠는, 네가 나르는 그것이 누군가의 하루를 조금 따뜻하게 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눈 오는 밤, 네 문을 두드리는 작은 소리가 들리거든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고 가만히 열어 주렴. 아빠도 너에게, 언제나 그렇게 열리는 문이고 싶단다.

잘 자렴, 우리 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