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갓을 씌워 준 할아버지
소복소복 눈이 내리던 섣달그믐 밤. 깊은 산골 외딴집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았답니다. 가진 것은 많지 않아도 두 사람 마음은 늘 넉넉했지요.
내일이면 새해인데, 집에는 떡 한 조각이 없었답니다. 쌀독을 기울이자 쌀 한 줌이 사르르 굴러 나왔어요. 할머니는 빈 쌀독 바닥을 한참 들여다보았습니다.
“올해가 다 저물었는데, 내가 뭐라도 엮어 봐야겠소.” “그럼 저는 등불을 밝혀 놓을게요.” 할아버지는 밤새 갈대를 엮었어요. 새벽녘, 마루에는 고운 삿갓 다섯 개가 나란히 놓였습니다.
이튿날 아침, 할아버지는 삿갓을 등에 지고 눈길을 걸어 장으로 갔어요. “삿갓 사세요, 눈 잘 막아 주는 아주 튼튼한 삿갓이요.” 그런데 그믐날 장터에서 삿갓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답니다.
해가 기울자 장터도 하나둘 문을 닫았지요. 떡을 잔뜩 안은 아주머니가 미안한 얼굴로 지나갔어요. “아이고, 오늘은 떡부터 사야 해서요. 새해 지나면 꼭 하나 사러 올게요.”
할아버지는 삿갓 다섯 개를 도로 지고 길을 나섰답니다.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어요. 등보다 마음이 더 무거웠습니다.
들길 한가운데, 눈을 하얗게 뒤집어쓴 돌부처 여섯 분. 어깨에도 머리에도 눈이 소복이 얹혀 있었어요. 동네 사람들 말로는, 아주 오래오래 그 자리를 지켜 오신 분들이라더군요.
“아이고, 이 추운 밤에 얼마나 시리실까.” 할아버지는 걸음을 멈추고 언 손으로 눈을 툭툭 털어 드렸어요. 털어도 털어도 눈은 다시 소복소복 내려앉았지요.
그러다 문득, 등에 진 삿갓이 생각났습니다. 할아버지는 삿갓을 꺼내 첫 번째 돌부처께 씌워 드렸어요. “자, 이거라도 하나씩 쓰십시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까지 정성껏 씌워 드렸지요.
그런데 다섯 개를 다 씌우고 나니, 마지막 한 분이 그대로 남았어요. 할아버지의 등은 이미 텅 비어 있었고, 눈은 여전히 펑펑 내렸지요. 한참을 서 있던 할아버지가, 머리에 두른 수건을 스르르 풀었답니다.
“제게 남은 게 이것뿐이라, 미안합니다. 이제 좀 덜 시리시겠지요.” 그건 찬바람을 막아 주던, 하나뿐인 수건이랍니다. 할아버지는 그 수건을 여섯 번째 돌부처께 가만히 씌워 드렸습니다.
“볼 낯이 없구려, 빈손으로 왔소.” “참 잘하셨어요, 저라도 꼭 그렇게 했을걸요.” 할머니는 나무라기는커녕 환하게 웃었지요. 두 사람은 뜨거운 물 한 그릇을 나눠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어요.
깊은 밤, 어디선가 눈길 밟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뽀드득 뽀드득, 여럿이 무거운 것을 나눠 지고 오는 소리였지요. “영차, 영차.” 다정하고 낮은 소리가 눈발 사이로 섞여 들었습니다.
소리는 문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저만치 멀어져 갔습니다. 아침에 문을 열어 본 두 사람은 눈이 동그래졌어요. 쌀과 떡, 생선과 도톰한 옷가지가 소복이 놓여 있었거든요.
눈 덮인 들길 저쪽으로 발자국이 줄줄이 이어져 있었지요. 그 끝에는 삿갓을 쓴 돌부처 여섯 분이 나란히 서 계셨어요. 여섯 번째 분 머리에는, 할아버지의 낡은 수건이 포근포근 얹혀 있었고요.
그해 설은 그 어느 해보다 따뜻했대요. 눈이 펑펑 내리는 밤이면, 마을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었답니다. 지금도 그 들길 위에는 눈이 가장 조용히 내린다지요.
할아버지가 가진 건 삿갓 다섯 개뿐이었어. 여섯 번째 분 앞에 섰을 때, 할아버지의 등은 이미 텅 비어 있었지. 그런데 할아버지는 돌아서지 않고, 자기 머리에 두른 수건을 가만히 풀었단다.
아빠는 이 대목에서 늘 잠깐 숨을 고른단다. 다섯 개는 등에서 꺼낸 것이었지만, 여섯 번째는 자기가 쓰고 있던 것이었으니까. 그 수건 한 장이 아빠에게는 삿갓 다섯 개보다 크게 보여. 아빠는 우리 아가가 그렇게 마지막 한 겹까지 건넬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날 밤 문 앞에 놓인 것은 삿갓 값이 아니었어. 눈 맞고 선 누군가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 그 마음이, 조용히 되돌아온 거란다. 그렇게 돌아오는 마음이 세상에 있다는 걸, 아빠는 믿는단다.